적당한 길이의 담론

(MN11)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른 종교와 다른 점

수행자1 2023. 3. 3. 23:20

 

 

Cūḷasīhanādasutta (쭐-라시-하나-다숫따)

원문을 보시려면 여기를 방문바랍니다. https://suttacentral.net/mn11/en/sujato

Middle Discourses 11

중간 담론 11

The Shorter Discourse on the Lion’s Roar

사자의 포효에 대한 짧은 담론

So I have heard. At one time the Buddha was staying near Sāvatthī in Jeta’s Grove, Anāthapiṇḍika’s monastery. There the Buddha addressed the mendicants, “Mendicants!”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부처님은 사-왓티-(Sāvatthī) 근처 제타(Jeta)의 숲에 있는 아나-타삔띠까(Anāthapiṇḍika)의 수도원에 머물고 있었다. 그곳에서 부처님이 수행자들을 불렀다, "수행자 여러분!"

“Venerable sir,” they replied. The Buddha said this:

"존경받아 마땅한 스승님," 그들이 대답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Only here is there a true ascetic, here a second ascetic, here a third ascetic, and here a fourth ascetic. Other sects are empty of ascetics.’ This, mendicants, is how you should rightly roar your lion’s roar.

"'오직 여기에만 진정한 고행자가 있고, 여기에는 두 번째 고행자가 있고, 여기에는 세 번째 고행자가 있고, 여기에는 네 번째 고행자가 있습니다. 다른 종파에는 고행자가 없습니다.' 이것이, 수행자 여러분, 바로 여러분이 사자의 포효를 올바르게 외치는 방법입니다.

It’s possible that wanderers who follow other paths might say: ‘But what is the source of the venerables’ self-confidence and forcefulness that they say this?’ You should say to them: ‘There are four things explained by the Blessed One, who knows and sees, the perfected one, the fully awakened Buddha. Seeing these things in ourselves we say that:

다른 길을 따라가는 떠돌아 다니면서 수행하는 자들은 이렇게 말할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덕망있는 분들이 이렇게 말하는 자신감과 강인함의 근원은 무엇일까?' 여러분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축복받은 분, 알고 보는 자, 완전한 분, 완전히 깨달은 부처님이 설명하신 4 가지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우리 스스로에게서 보고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Only here is there a true ascetic, here a second ascetic, here a third ascetic, and here a fourth ascetic. Other sects are empty of ascetics.” What four? We have confidence in the Teacher, we have confidence in the teaching, and we have fulfilled the precepts. And we have love and affection for those who share our path, both laypeople and renunciates. These are the four things.’

"오직 여기에만 진정한 고행자가 있고, 여기에는 두 번째 고행자가 있고, 여기에는 세 번째 고행자가 있고, 여기에는 네 번째 고행자가 있습니다. 다른 종파에는 고행자가 없습니다." 4 가지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스승님을 신뢰하고, 가르침을 신뢰하며, 계율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재가신자와 출가자 모두, 우리와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4 가지입니다.'

It’s possible that wanderers who follow other paths might say: ‘We too have confidence in the Teacher—our Teacher; we have confidence in the teaching—our teaching; and we have fulfilled the precepts—our precepts. And we have love and affection for those who share our path, both laypeople and renunciates. What, then, is the difference between you and us?’

다른 길을 따라가는 떠돌아 다니면서 수행하는 자들은 이렇게 말할 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스승님—우리의 스승님을 신뢰합니다; 우리도 가르침—우리의 가르침을 신뢰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계율—우리의 계율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재가신자와 출가자 모두, 우리와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과 우리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You should say to them: ‘Well, reverends, is the goal one or many?’ Answering rightly, the wanderers would say: ‘The goal is one, reverends, not many.’

여러분은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그럼, 존경하는 분, 목표가 하나입니까, 아니면 여러개입니까?' 올바르게 대답하면, 떠돌아 다니면서 수행하는 자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목표는 하나입니다, 존경하는 분, 여러개가 아닙니다.'

‘But is that goal for the greedy or for those free of greed?’ Answering rightly, the wanderers would say: ‘That goal is for those free of greed, not for the greedy.’

'그러면 그 목표는 탐욕스러운 사람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탐욕이 없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까?' 올바르게 대답하면, 떠돌아 다니면서 수행하는 자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 목표는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탐욕이 없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Is it for the hateful or those free of hate?’ ‘It’s for those free of hate.’

'증오하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증오가 없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까?' '증오가 없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Is it for the delusional or those free of delusion?’ ‘It’s for those free of delusion.’

'오해하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오해가 없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까?' '오해가 없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Is it for those who crave or those rid of craving?’ ‘It’s for those rid of craving.’

'갈애(craving : 어떤 것에 대한 강한 욕망)하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갈애를 없앤 사람을 위한 것입니까?' '갈애를 없앤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Is it for those who grasp or those who don’t grasp?’ ‘It’s for those who don’t grasp.’

'꽉쥐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꽉쥐지 않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까?' '꽉쥐지 않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Is it for the knowledgeable or the ignorant?’ ‘It’s for the knowledgeable.’

'지식이 있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무지한 사람을 위한 것입니까?' '지식이 있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Is it for those who favor and oppose or for those who don’t favor and oppose?’ ‘It’s for those who don’t favor and oppose.’

'찬성하고 반대하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찬성하지 않고 반대하지 않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까?' '찬성하지 않고 반대하지 않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But is that goal for those who enjoy proliferation or for those who enjoy non-proliferation?’ Answering rightly, the wanderers would say: ‘It’s for those who enjoy non-proliferation, not for those who enjoy proliferation.’

'그러면 그 목표는 (지각의) 확산(proliferation : 어떤 것의 수나 양의 갑작스럽게 증가; 특정한 것의 많은 수)을 즐기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비확산을 즐기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까?' 올바르게 대답하면, 떠돌아 다니면서 수행하는 자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확산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 비확산을 즐기는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Mendicants, there are these two views: views favoring continued existence and views favoring ending existence. Any ascetics or brahmins who cling, hold, and attach to a view favoring continued existence will oppose a view favoring ending existence. Any ascetics or brahmins who cling, hold, and attach to a view favoring ending existence will oppose a view favoring continued existence.

수행자 여러분, 이런 2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계속되는 존재를 선호하는 견해와 존재의 소멸을 선호하는 견해입니다. 계속되는 존재를 선호하는 견해에 매달리고, 붙들고, 집착하는 고행자나 브라만은 존재의 소멸을 지지하는 견해에 반대할 것입니다. 존재의 소멸을 선호하는 견해에 매달리고, 붙들고, 집착하는 고행자나 브라만은 계속되는 존재를 선호하는 견해에 반대할 것입니다.

There are some ascetics and brahmins who don’t truly understand these two views’ origin, ending, gratification, drawback, and escape. They’re greedy, hateful, delusional, craving, grasping, and ignorant. They favor and oppose, and they enjoy proliferation. They’re not freed from rebirth, old age, and death, from sorrow, lamentation, pain, sadness, and distress. They’re not freed from suffering, I say.

이 2 가지 견해의 시작, 끝남, 쾌감(gratification : 어떤 일이 잘 되거나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 쾌감을 느끼는 상태; 즐거움을 주는 어떤 것), 결함, 벗어남을 진정으로 깨닫지 못하는 고행자와 브라만이 있습니다. 그들은 탐욕스럽고, 미워하고, 오해하고, 갈망하고, 꽉쥐고, 무지합니다. 그들은 찬성하고 반대하며, (지각의) 확산을 즐깁니다. 그들은 다시 태어남, 늙음, 죽음으로부터, 슬픔, 비탄, 통증, 비애, 고뇌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들은 괴로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나는 말합니다.

There are some ascetics and brahmins who do truly understand these two views’ origin, ending, gratification, drawback, and escape. They’re rid of greed, hate, delusion, craving, grasping, and ignorance. They don’t favor and oppose, and they enjoy non-proliferation. They’re freed from rebirth, old age, and death, from sorrow, lamentation, pain, sadness, and distress. They’re freed from suffering, I say.

이 두 가지 견해의 시작, 끝남, 쾌감, 결함, 벗어남을 진정으로 깨닫는 고행자와 브라만이 있습니다. 그들은 탐욕을 제거하고, 미워함을 제거하고, 오해함을 제거하고, 갈망함을 제거하고, 꽉쥠을 제거하고, 무지를 제거합니다. 그들은 찬성하지도 않고 반대도 하지 않고, (지각의) 비확산을 즐깁니다. 그들은 다시 태어남, 늙음, 죽음으로부터, 슬픔, 비탄, 통증, 비애, 고뇌로부터 해방됩니다. 그들은 괴로움에서 해방되었다고 나는 말합니다.

There are these four kinds of grasping. What four? Grasping at sensual pleasures, views, precepts and observances, and theories of a self.

꽉쥠(grasping : 누군가, 무언가를 강하게 붙잡는 것, 집착, 욕심)에는 4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4 가지는 무엇이겠습니까? 감각적 쾌락을 꽉쥠, 견해를 꽉쥠, 계율과 (계율) 준수를 꽉쥠, 자아에 대한 이론을 꽉쥠 입니다.

There are some ascetics and brahmins who claim to propound the complete understanding of all kinds of grasping. But they don’t correctly describe the complete understanding of all kinds of grasping. They describe the complete understanding of grasping at sensual pleasures, but not views, precepts and observances, and theories of a self. Why is that? Because those gentlemen don’t truly understand these three things. That’s why they claim to propound the complete understanding of all kinds of grasping, but they don’t really.

모든 종류의 꽉쥠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제시한다고 주장하는 고행자와 브라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종류의 꽉쥠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감각적 쾌락을 꽉쥠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설명하지만, 견해를 꽉쥠, 계율과 (계율) 준수를 꽉쥠, 자아에 대한 이론을 꽉쥠은 아닙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왜냐하면 그 올바른 사람들은 이 3 가지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모든 종류의 꽉쥠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제시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There are some other ascetics and brahmins who claim to propound the complete understanding of all kinds of grasping, but they don’t really. They describe the complete understanding of grasping at sensual pleasures and views, but not precepts and observances, and theories of a self. Why is that? Because those gentlemen don’t truly understand these two things. That’s why they claim to propound the complete understanding of all kinds of grasping, but they don’t really.

모든 종류의 꽉쥠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제시한다고 주장하는 다른 고행자와 브라만이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감각적 쾌락을 꽉쥠과 견해를 꽉쥠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설명하지만, 계율과 (계율) 준수를 꽉쥠, 자아에 대한 이론을 꽉쥠은 아닙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왜냐하면 그 올바른 사람들은 이 2 가지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모든 종류의 꽉쥠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제시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There are some other ascetics and brahmins who claim to propound the complete understanding of all kinds of grasping, but they don’t really. They describe the complete understanding of grasping at sensual pleasures, views, and precepts and observances, but not theories of a self. Why is that? Because those gentlemen don’t truly understand this one thing. That’s why they claim to propound the complete understanding of all kinds of grasping, but they don’t really.

모든 종류의 꽉쥠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제시한다고 주장하는 다른 고행자와 브라만이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감각적 쾌락을 꽉쥠, 견해를 꽉쥠, 계율과 (계율) 준수를 꽉쥠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설명하지만, 자아에 대한 이론을 꽉쥠은 아닙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왜냐하면 그 올바른 사람들은 이 1 가지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모든 종류의 꽉쥠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제시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In such a teaching and training, confidence in the Teacher is said to be far from ideal. Likewise, confidence in the teaching, fulfillment of the precepts, and love and affection for those sharing the same path are said to be far from ideal. Why is that? It’s because that teaching and training is poorly explained and poorly propounded, not emancipating, not leading to peace, proclaimed by someone who is not a fully awakened Buddha.

그러한 가르침과 수행에서, 스승에 대한 신뢰는 이상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가르침에 대한 신뢰, 계율의 실현, 그리고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애정은 이상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것은 가르침과 수행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제대로 제시되지 않고, 해방되지 않았고, 평화로 이끌지 않으며, 완전히 깨달은 부처님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 선포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The Realized One, the perfected one, the fully awakened Buddha claims to propound the complete understanding of all kinds of grasping. He describes the complete understanding of grasping at sensual pleasures, views, precepts and observances, and theories of a self.

깨달은 자, 완전한 자, 완전히 깨달은 부처님은 모든 종류의 꽉쥠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제시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감각적 쾌락을 꽉쥠, 견해를 꽉쥠, 계율과 (계율) 준수를 꽉쥠, 자아에 대한 이론을 꽉쥠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설명합니다.

In such a teaching and training, confidence in the Teacher is said to be ideal. Likewise, confidence in the teaching, fulfillment of the precepts, and love and affection for those sharing the same path are said to be ideal. Why is that? It’s because that teaching and training is well explained and well propounded, emancipating, leading to peace, proclaimed by a fully awakened Buddha.

그러한 가르침과 수행에서, 스승에 대한 신뢰가 이상적이라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가르침에 대한 신뢰, 계율의 실현, 그리고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이상적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것은 가르침과 수행이 제대로 설명되었고, 제대로 제시되었고, 해방되고, 평화로 이끌고, 완전히 깨달은 부처님에 의해 선포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What is the source, origin, birthplace, and inception of these four kinds of grasping? Craving. And what is the source, origin, birthplace, and inception of craving? Feeling. And what is the source of feeling? Contact. And what is the source of contact? The six sense fields. And what is the source of the six sense fields? Name and form. And what is the source of name and form? Consciousness. And what is the source of consciousness? Choices. And what is the source of choices? Ignorance.

이 4 가지 종류의 꽉쥠(grasping : 누군가, 무언가를 강하게 붙잡는 것, 집착, 욕심)의 근원, 시작, 탄생한 곳, 처음은 무엇이겠습니까? 갈애(craving : 어떤 것에 대한 강한 욕망)입니다. 그러면 갈애의 근원, 시작, 탄생한 곳, 처음은 무엇이겠습니까? 느낌(feeling: 감각을 통해서나 마음을 통해서 당신이 느끼는 어떤 것)입니다. 그러면 느낌의 근원은 무엇이겠습니까? 접촉(contact : 누군가를 만나거나 무언가를 처리해야 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면 접촉의 근원은 무엇이겠습니까? 6 가지 감각 영역입니다. 그러면 6 가지 감각 영역의 근원은 무엇이겠습니까? 명칭(name : 특정 인물, 동물, 장소 또는 사물이 알려지게된 단어 또는 단어들)과 형태(form : 어떤 것이 존재하게 하거나 존재하는 것 같거나, 존재하도록 보이게 하는 특별한 방법)입니다. 그러면 명칭과 형태의 근원은 무엇이겠습니까? 의식(consciousness: 무슨일이 일어나는지를 이해하는데 정신적인 힘과 감각을 사용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면 의식의 근원은 무엇이겠습니까? 선택(choices : 두개 혹은 그 이상의 가능성 중에서 고르는 행동)입니다. 그러면 선택의 근원은 무엇이겠습니까? 무지(ignorance :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의 부족. in- (not) + gno- (know) = 알지 못함)입니다.

When that mendicant has given up ignorance and given rise to knowledge, they don’t grasp at sensual pleasures, views, precepts and observances, or theories of a self. Not grasping, they’re not anxious. Not being anxious, they personally become extinguished.

저 수행자가 무지를 버리고 지식을 일으켰을 때, 그들은 감각적 쾌락을 꽉쥠, 견해를 꽉쥠, 계율과 (계율) 준수를 꽉쥠, 자아에 대한 이론을 꽉쥠을 꽉쥐지 않습니다. 꽉쥐지 않음으로써,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하고 싶어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개인적으로 소멸(extinguish : 불이 타는 것을 멈추거나 빛이 빛나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하게 됩니다.

They understand: ‘Rebirth is ended, the spiritual journey has been completed, what had to be done has been done, there is no return to any state of existence.’”

그들은 이렇게 깨닫습니다: '환생은 끝났구나, 영적 여정이 완료되었구나, 해야 할 일이 끝났구나, 어떤 존재의 상태로도 돌아갈 수 없구나.'"

That is what the Buddha said. Satisfied, the mendicants were happy with what the Buddha said.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다. 납득한 수행자들은 부처님 말씀에 만족했다.

부처님이 가르침을 펼 당시에, 자이나교, 아지비카교 등 다른 종교가 많았다. 경전에도 부처님 이외에도 교단과 공동체를 이끄는 종교 창시자들이 있다고 하면서 뿌-라나 깟사빠 (Pūrana Kassapa),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āla), 니간타 나-따뿟따(Nigaṇṭha Nāṭaputta), 산자야 벨랏티뿟따(Sanjaya Belaṭṭhiputta), 빠꾸다 깟짜-야나(Pakudha Kaccāyana) 및 아지따 께사깜발라(Ajita Kesakambala)를 언급하기도 한다.

 

그만큼 당시에는 부처님 이외에도 다양한 가르침을 펼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이론에 비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른 점을 설하고 있는 경전이다. 하지만, 당시 비교되던 종교의 자세한 교리를 알기 어려우므로, 이번 경전은 조금 이해하기가 어려운 편이다. 하지만, 아래와 같이 2 가지 견해로 크게 갈라진다.

 

■ 2 가지 견해
• 계속되는 존재를 선호하는 견해
• 존재의 소멸을 선호하는 견해

 

이 중에서 부처님 가르침은 이 2 가지 견해 모두 찬성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 가르침이며, "2 가지 견해의 시작, 끝남, 쾌감, 결함, 벗어남을 진정으로 깨닫지 못함 → 탐욕스럽고, 미워하고, 오해하고, 갈망하고, 꽉쥐고, 무지함, 그리고 (지각의) 확산을 즐김 → 다시 태어남, 늙음, 죽음으로부터, 슬픔, 비탄, 통증, 비애, 고뇌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말하며, 4 가지 종류의 꽉쥠(집착)과 연기법은 오직 부처님만 가르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4 가지 종류 꽉쥠
• 감각적 쾌락을 꽉쥠
• 견해를 꽉쥠
• 계율과 (계율) 준수를 꽉쥠
• 자아에 대한 이론을 꽉쥠

 

■ 무지 → 선택 → 의식 → 명칭과 형태 → 6 가지 감각 영역 → 접촉 → 느낌 → 갈애 → 꽉쥠

 

승가제바(僧伽提婆)가 번역한 한역 "중아함경 사자후경" 역시 같은 내용으로 다음 링크에서 읽을 수 있다.

 

부처님 말씀

반야심경,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아함경의 주요 경전을 검색하실 수 있는 불경 검색 사이트입니다.

www.wordofbuddh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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